고리대금법, 금리 상한선, 그리고 부채의 도덕적 지위

모든 대출 계약에는 오래된 도덕적 질문 하나가 숨어 있다.
왜 돈이 필요한 사람은 단지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더 많은 돈을 갚아야 하는가?
자본주의 때문이라고 답할 수도 있겠지만, 현대 경제학은 보다 단순한 설명을 내놓는다. 이자는 자본의 가격이라는 것이다.
이자는 시간, 인플레이션, 채무불이행 위험, 그리고 돈을 다른 곳에 빌려주거나 투자했을 때 얻을 수 있었던 기회비용에 대한 보상이다.
그 자체로 충분한 논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차입자가 부채로 인해 처하게 되는 도덕적 문제로부터 더 잘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가 존재할 가능성도 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으로 돈을 버는 행위를 부자연스럽다고 봤다.
중세 기독교 사상가들은 고리대금을 심각한 도덕적 잘못으로 여겼으며, 유대교와 이슬람 전통에서도 이자를 받는 대출에 여러 제한을 두었다. 물론 각 종교의 규칙과 해석은 시대와 공동체에 따라 달랐다.
오늘날에도 이슬람 금융은 일반적으로 이자를 뜻하는 리바(riba)를 금지하는 대신, 무역·리스·위험분담형 금융 같은 구조는 허용한다.
현재 대부분의 경제권에서는 이자 자체는 허용하되 지나치게 높은 이자에 대해서는 규제를 가한다.
그러나 과거의 논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논쟁의 무대가 급여일 대출(payday lending), 디지털 신용, P2P 대출 플랫폼, 탈중앙화금융(DeFi)로 옮겨졌을 뿐이다.
따라서 흥미로운 질문은 단순히 “이자는 도덕적으로 잘못된가?”가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자의 도덕성이 이자율 자체에서 결정되는지, 아니면 그 이자를 둘러싼 경제적 관계에서 결정되는지다.

돈으로 돈을 버는 것에 대한 오래된 의심
고리대금의 역사는 근본적인 개념적 문제에서 출발한다.
돈은 원래 교환을 쉽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화폐에 대한 윤리적 사고도 인간이 자연 세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던 시대에 형성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화폐가 상품 교환을 쉽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므로, 화폐의 자연스러운 목적은 무한한 부의 축적이 아니라 거래와 인간의 필요 충족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이자를 비판한 논리도 여기서 출발한다.
그는 그리스어 토코스(tokos)가 ‘이자’와 ‘자식·후손’이라는 두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그가 구분한 두 개념과도 연결된다.
하나는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가정 관리인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이고, 다른 하나는 부 자체를 목적으로 끝없이 추구하는 크레마티스티케(chrematistike)다.
전자는 자연스러운 목적과 한계가 있지만, 후자는 끝없는 축적의 과정으로 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사상가들도 비슷한 논리를 발전시켰다.
그들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 사실상 같은 것에 두 번 값을 받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논리는 돈이 사용되는 과정에서 ‘소비되는 것’으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현대 경제학자의 관점에서는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현대 금융은 시간 자체에도 경제적 가치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늘의 1달러와 5년 뒤의 1달러는 같은 가치가 아니다.
그 돈을 다른 곳에 투자할 수도 있고, 인플레이션 때문에 구매력이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의 이자 비판이 단순히 경제학적 무지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정의에 대한 문제의식도 있었다.
대출자는 종종 차입자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기근, 질병, 퇴거 위기에 처한 사람이라면 사실상 어떤 조건의 대출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때 도덕적 문제는 자본이 수익을 얻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취약성이 다른 사람의 이익 추출 기회가 되는가에 있다.
기독교, 이슬람 그리고 대출의 도덕적 의미
오늘날 고리대금에 관한 종교적 금지의 역사를 단순히 “종교는 이자를 반대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서로 다른 종교 전통은 이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규칙과 정의, 예외를 발전시켰다.
중세 기독교에서는 고리대금이 널리 비난받았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에 따르면, 그 이유 중 하나는 대출자가 자신이 빌려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또 다른 문제도 지적했다.
차입자는 종종 필요에 의해 이런 거래에 들어가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동의가 얼마나 자발적인지 의문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현대 경제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계약은 형식적으로는 자발적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매우 불평등한 상황에서 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금융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또 다른 사례다.
꾸란은 무역과 이자를 명확하게 구분하며 리바를 금지한다.
현대 이슬람 금융은 일반적으로 사전에 확정된 이자를 받는 대출을 허용하지 않지만, 상업적 이익, 리스, 위험분담에 기반한 금융 구조는 허용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러한 체계를 공정성, 실물경제 활동, 위험 공유를 강조하는 시스템으로 설명한다.
이것이 이자 금지의 배경에 있는 경제철학이다.
만약 금융 제공자가 투자 결과와 상관없이 미리 확정된 수익을 받는다면, 경제적 위험의 상당 부분이 차입자에게 전가될 수 있다.
반대로 이익공유 구조는 금융 수익을 실제 생산 활동과 위험에 더 긴밀하게 연결하려 한다.
물론 이것이 이슬람 금융에서 경제적 위험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위험과 수익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에 대해 다른 도덕적 원칙을 선택했다는 의미다.
금리 상한선의 경제학
2026년 발표된 NBER 연구는 케냐의 2016년 금리 규제를 분석했다.
연구진은 대출자의 위험 수준에 따라 금리 상한제에 대한 반응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일률적인 금리 상한선은 고위험 차입자에 대한 신용 공급을 없애 상당한 후생 손실을 일으킬 수 있었다.
반면 규제 적용에서 제외된 디지털 플랫폼은 일부 차입자의 신용 접근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과거 세계은행 연구도 더 넓은 국제적 관점에서 비슷한 경고를 제시했다.
실질적으로 구속력 있는 금리 상한은 특히 무담보 대출이나 소액 대출의 공급을 줄일 수 있으며, 대출기관들은 더 큰 금액을 빌리는 사람이나 위험이 낮은 고객에게 집중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쪽 논리 역시 중요하다.
아무런 제한이 없다면 대출자는 경쟁 부족, 불충분한 정보 공개, 낮은 금융 이해도를 이용해 차입자를 착취할 수도 있다.
세계은행은 일부 대출업체들이 금리 제한을 피하기 위해 비용을 수수료 형태로 이전해 대출상품 간 비교를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문제는 단순히 “금리를 규제할 것인가, 시장에 맡길 것인가”의 선택이 아니다.
핵심은 제도를 어떻게 설계하느냐다.
잘못 설계된 상한제는 오히려 신용 접근성을 파괴할 수도 있다.
DeFi가 오래된 논쟁을 새로운 형태로 되살리다
탈중앙화금융은 일부 전통적인 금융 중개자를 제거하면서도 ‘대출’ 자체는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Aave의 대출 시스템에서는 사용자가 디지털 자산을 공급하고, 차입자는 담보를 바탕으로 유동성을 얻을 수 있다.
금리는 자금 이용률과 거버넌스 설정값 등 여러 요인에 따라 움직인다.
사용 가능한 유동성이 부족해지면 금리가 올라 추가 차입을 억제하고, 더 많은 자금 공급을 유도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로토콜이 볼 수 있는 것은 담보, 자금 이용률, 수학적 매개변수뿐이다.
프로토콜은 어떤 차입자가 직장을 잃었는지, 자녀가 아픈지, 내일 집세를 내기 위해 돈을 빌렸는지를 알 수 없다.
Aave 창립자 스타니 쿨레초프(Stani Kulechov)는 초창기 P2P 대출 방식에서 풀 기반 대출 방식으로 이동한 것이 대출의 접근성과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변화였다고 설명한 바 있다.
초기 P2P 방식에서는 대출자와 차입자가 직접 조건을 협상했지만, 풀 방식에서는 매칭이 자동화됐으며 차입자는 담보를 제공하고 보다 즉시 유동성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즉 DeFi는 일부 인간의 재량 판단을 코드와 자동화로 대체했다.
고리대금법은 실제로 무엇을 막아야 하는가?
고리대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회가 단순히 ‘이자율’만을 걱정해온 것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착취, 절박함, 불평등한 협상력, 그리고 부채가 초래하는 사회적 결과였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현대의 금융 규제는 단순한 표면 금리 이상의 문제를 다룬다.
나이지리아가 현대적 사례다.
나이지리아 연방경쟁소비자보호위원회(FCCPC)는 2025년 ‘디지털·전자·온라인 및 비전통적 소비자대출 규정’을 도입했다.
이 규정은 디지털 대출 분야에서 제기된 강압적인 채권 추심, 개인정보 침해, 착취적 행위 등에 대한 불만에 대응하기 위해 마련됐다.
규제는 투명성, 공정성, 책임 있는 영업행위, 소비자 보호 등에 관한 기준을 요구한다.
이자의 도덕성은 숫자 하나로 결정되지 않는다
고대의 고리대금 비판과 현대의 이자 옹호는 종종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처럼 제시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반대하는 주장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화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자와 대출이 인간 경제의 진화에 필요한 요소라고 본다.
고대 사상가들은 양쪽이 형식적으로 동의했더라도 금융 관계가 부당해질 수 있는가를 물었다.
반면 현대 경제학은 대출자가 위험을 부담하고 차입자가 자금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자본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분할 것인가를 묻는다.
고리대금의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이자가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부채에는 단순한 이자율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도덕적 결과가 존재한다.
대출자는 시간, 위험, 기회비용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받을 필요가 있다.
동시에 차입자 역시 자신이 받아들이는 의무에 대해 투명한 정보를 제공받고,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권리가 있다.
어느 한쪽도 단순히 최적화 문제 속의 변수처럼 취급돼서는 안 된다.
금리 상한선은 차입자를 보호할 수 있지만, 잘못 설계되면 오히려 그들을 제도권 금융에서 배제할 수도 있다.
반대로 자유로운 가격 결정은 신용 접근성을 확대할 수 있지만 동시에 착취의 기회도 늘릴 수 있다.
P2P 대출은 중개 비용을 줄일 수 있지만 정보 비대칭은 여전히 존재한다.
DeFi는 금리 결정과 담보 관리를 자동화할 수 있지만, 코드는 정의의 문제를 없애지 못한다.
따라서 고리대금법과 현대 P2P 대출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인 질문은 “돈으로 돈을 벌도록 허용해야 하는가?”가 아니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언제 금융 수익이 다른 사람의 취약성을 이용한 부당한 착취로 변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이 돈을 낳는 것 자체를 의심했다.
중세 기독교는 이를 정의와 자선이라는 도덕적 틀 안에서 바라봤다.
이슬람 금융은 오늘날에도 리바를 거부하면서, 무역·자산·위험분담에 기반한 대안적 구조를 발전시키고 있다.
현대 경제학은 여전히 이자를 희소한 자본을 배분하는 ‘가격’으로 바라본다.
오늘날의 과제는 이 서로 다른 관점들이 어디에서 겹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아마 가장 설득력 있는 결론은 이자가 본질적으로 선하지도, 본질적으로 악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대출은 금융 비용이 불평등한 권력 관계, 불완전한 정보, 인간의 취약성과 결합되는 순간 도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된다.
‘고리대금(usury)’이라는 오래된 단어가 아직까지 살아남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고, 단지 그것을 작동시키는 기계만 바뀌었을 뿐이다.
※ 면책조항: 이 기사는 정보 제공만을 목적으로 하며 거래 또는 투자 조언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금융·법률·세무 조언으로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암호화폐 거래 및 투자에는 상당한 금전적 손실 위험이 있으므로 항상 충분한 사전 조사를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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